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리 (문단 편집) == 본인 및 아들의 생존설 ==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들 다이스케의 도움으로 [[사츠마]] 등 [[규슈]] 언저리의 지방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다는 음모론이 오사카 전투 직후부터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가장 유력한 것 중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문서에도 있는 히지 번의 키노시타 씨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히데요리와 그 아들 쿠니마츠는 규슈로 도망해 히데요시의 혈연인 키노시타씨의 보호를 받고, 히데요리는 '소렌'이라는 이름을 대어 은거하고 아들 쿠니마츠는 아예 '키노시타 노부요시'라는 이름을 써서 번주인 키노시타 노부토시의 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노부토시는 유언으로 노부요시(쿠니마츠)에게 무리하게 큰 봉토를 따로 떼어 주어 '타테이시 번'으로 독립시키고, 노부요시의 성(묘지)을 '''히데요시가 사용했던''' '하시바'로 바꾸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위패에는 대놓고 '''도요토미 성'''이 적혀 있다.[* 키노시타씨는 히데요시의 처남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후손이다. 키노시타씨는 히데요시가 쓰던 하시바라는 이름(묘지), 도요토미 성을 받은 적이 있지만 후일 생존을 위해 도요토미 세력을 손절하면서 이 하시바 성을 모두 강제로 키노시타씨로 도로 개명당했다. 막부가 성씨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도요토미와 관계가 있는 세력들을 마구잡이로 숙청하는 살벌한 무단정치 시국에 대놓고 쓰지 말라는 성씨를 갖다 쓰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때 영문도 모르고 히지 번의 영토를 크게 떼어주는 것을 막은 가로 하나가 나중에 노부요시의 정체를 알고 미안한 마음에 자결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속사정은 타테이시 번주 가문의 당주에게만 극비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단 여기에도 몇 가지 허술한 점이 있어서 반박은 가능하다. 도요토미 성이 절대적 금기는 아니어서, 히지 번 키노시타씨는 에도 막부 시기에도 후일 슬그머니 도요토미 성을 다시 공식 문서에서까지 사용한 적이 있고 막부 역시 소규모 번에 불과한 히지 번이 이런 문제적 호칭을 쓰는 걸 잠자코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초대 번주인 노부토시 본인의 경우 무단통치를 펼치던 막부의 눈치를 보고 싶었는지 발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를 써서 豊臣이 아니라 豊富라고 표기한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https://dot.asahi.com/wa/2016012800099.html?page=1|#]]] [[이경직(1577)|이경직]]은 1617년 통신사로 파견되어 당시 일본의 정세와 풍물에 대해 꽤 폭넓고 정확도가 높은 정보를 수집했는데, 직접적으로 질문했을 때 10명 중 1명 정도는 히데요리가 생존해 있다고 답했고 시중에는 꽤 넓게 그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하며, 히데요리가 자결했다는 장소에서 그가 평소 쓰던 귀한 갑주와 검을 착용한 주검을 발견했는데 허리 위로는 모두 불타 있어 확증은 불가능했다는 현지의 정보를 기록했다. 또한 그가 도피해 갔다는 음모론이 있는 [[사츠마]]인들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속이 있어서 윗사람을 배반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피신한 히데요리를 모셔왔다면 저렇게 막부에 순종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 사츠마 도피설은 아무래도 헛소리 같다는 자신의 판단도 곁들였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은 음모론에 불과하지만, 오사카 전투 직후부터 일본 사회 전반에 널리 유포된 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사자인 히지 번 키노시타 가문의 현재 입장은 생존설 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